태풍이 지나간 이른 아침에
길을 걸었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왕벚나무들이
곳곳에 쓰러져 처참했다

그대로 밑둥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는
나무들의 몸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키 작은 나무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쥐똥나무는 몇 알
쥐똥만 떨어뜨리고 고요했다

심지어 길가의 풀잎도
지붕 위의 호박넝쿨도 쓰러지지 않고
햇볕에 젖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굳이 풀잎같이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까닭을
그제서야 알고
감사하며 길을 걸었다.

정호승 – 감사하다



1년 6개월여만에 쇄골에 박아놨던 철심을 빼내는 수술을 했다.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이긴 하지만, 전처럼 부러진 뼈에 임플란트를 박아 넣는 것은 아니기에 훨씬 수월할 것 이라고 했다. 수술은 두어 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수술이 끝났을 땐 들어갈 때와 달리 목구멍이 칼칼해서 침을 삼키기가 힘들었다. 어깨로 찬기가 들었고, 무엇보다 다른 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거슬려 병실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병실로 돌아와서도 정신이 맑아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프면 초록색 버튼을 한번 누르세요” 간호사가 진통제를 투여하는 방법과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초록색 버튼 몇 방에 진통이 사라지고 정신이 들었다. 복도라도 걸어볼까 싶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런데 항생제와 진통제 링거줄이 폴대에 꼬여서 마음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꼬인 줄이 쉽게 풀리지 않자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건지.

순간의 실수로 꽤 오랜 시간 – 계획과 방향, 일상과 관계가 꼬이고 비틀어져 버렸다. 겉으로 보이는 뒤틀림은 바로잡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듯, 멀쩡한듯싶은 것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내면은 나조차 모르는 사이에 비틀어지고 꼬여버린 것 같다.


힘내! 꼬여도 나만큼 꼬였겠니?
빵집에 들렀다가 꽈배기의 파이팅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시답지 않은 문구가 뭐라고… 그간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꼬이고 뒤틀렸어도 밑동이 부러지거나 뿌리를 하늘로 드러내고 몸부림치지는 않으니…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나 왕벚나무가 아니라 풀잎같이 작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까닭에 잠시 감사했다고나 할까.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김사인 – 조용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