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렇게 두었다

얼마 전 나는 직진·우회전 차선에서 멈춰 섰다는 이유만으로, 뒤따르던 택시 기사에게 욕설을 들어야 했다. 하루의 끝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던 참에 겪은 불쾌한 경험. 이는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반갑게 건넨 인사를 무시하고 냉랭하던 직원 때문에 온종일 속을 끓이기도 하고, 나만 제외된 친구들의 SNS 사진에 씁쓸한 밤을 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는 타인의 언행에 소중한 시간과 감정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타인의 영역’에 쏟아부으며 살아갈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려는 시도는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우리를 지치게 만들 뿐이다. 이런 에너지 낭비를 멈추고 싶다면, 멜 로빈스의 ‘렛뎀 이론(Let Them Theory)’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름 그대로, ‘그렇게 하게 두는’ 태도를 의미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친구들이 나를 모임에 초대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두라. 누군가 나를 오해하고 싶어 하는가? 그것 또한 그렇게 두라. 처음에는 이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렛뎀’은 관계를 포기하는 냉소나 무기력한 체념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영역을 인정하고, 그로부터 나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긋는 건강한 경계선이자, 내 감정을 쏟을 대상을 현명하게 선택하겠다는 주체적인 결단이다.

이렇듯 ‘렛뎀 이론’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가 유한한 자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만약 타인의 인정을 받거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데 이 자원을 모두 써버린다면, 정작 자신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몫은 남지 않게 된다. 그렇기에 ‘그렇게 두는 것’은 흩어지던 에너지의 방향을 오롯이 나에게로 되돌리는 의식적인 선택이자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태도는 아주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나는 그 뿌리가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지혜. 바로 스토아 철학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통제 가능한 것’과 ‘통제 불가능한 것’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타인의 무례한 행동은 통제 불가능한 외부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반응할지는 통제 가능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흔드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Men are disturbed not by things, but by the views which they take of them.
Enchiridion 5, Epictetus

타인에게 쏟아붓던 에너지를 거두어들이면, 그 자리엔 무엇이 남을까. 처음의 허전함이 지나가면, 그 빈 공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과 가능성으로 채울 수 있다. 누군가를 설득하던 힘으로 내면을 탐구하고, 잊었던 나를 찾아는 과정을 통해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이다.

타인은 타인에게 맡겨두고,
나는 나의 삶을 사는 것.
내 인생의 운전대를 타인에게서 되찾아오는
이 단순한 생각의 전환,
이것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형태의 자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