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예전에 다른 블로그에 이미경 작가의 전시회에 관한 글을 게시한 적이 있다. 이미경 작가는 사라져가는 낡은 구멍가게를 캔버스 위에 재탄생시킨다. 판화나 소묘에서 평행선이나 교차 선으로 대상의 음영, 명암, 양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해칭(Hatching) 기법이라고 한다. 작가는 잉크를 조색하고 바늘처럼 가느다란 펜촉으로 한 땀 한 땀 그려낸다. 오직 선으로만 나뭇잎 한 장을 그려내려면 열댓 번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선을 그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작품 하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반드시 그에 준하는 물리적인 시간이 소요된다.

좋은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기술적으로나 시간상으로 얼마큼 공들였냐?’가 전부는 아니지만, 이미경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생을 갈아 만든 작품’이란 생각에 경외감이 든다. 작가의 작품에는 따뜻한 구멍가게와 뜨거운 생명 한 덩이가 담겼다.


역삼동 ‘갤러리이마주’에서 이미경 작가 개인전이 열렸다. 나는 여러 작품 중 ‘칠다리 슈퍼’라는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커다란 미루나무 아래 붉은색 지붕을 덮고 있는 칠다리 슈퍼. ‘이 가게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호기심과 반가움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노란 장판을 깔아 만든 평상과 빨간 우체통 그리고 담배 간판, 음료 자판기, 공병 상자가 놓여있다. 파란 유리문 안쪽엔 복분자, 알로에, 포도 봉봉, 비타 500, 처음처럼, 신라면 등 익숙한 상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게 문은 열려있지만, 주인은 자리를 비운 듯하다.


칠다리 슈퍼가 사라지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칠다리 슈퍼에 관련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칠다리 슈퍼군산시 옥산면에 있는 작은 가게이며, 노란 금당교 넘머 포플러 나무는 50년 전에 첫 아이 출생 기념으로 심었다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린 지 얼마 후 ‘첫 아이’의 자녀로 짐작되는 분께서 댓글을 남겨주었다. 칠다리 슈퍼는 철거되었고, 슈퍼를 지키던 포플러 나무도 이제 볼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또 몇 달 뒤 이번에는 실제 그 ‘첫 아이’분께서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었다. 슈퍼가 철거되었다는 댓글을 남겨준 분이 자녀라는 것과 포플러 나무는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동생이 태어났을 때 삼촌이 심은 나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이제 더 지킬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집이 철거될 즈음 나무는 자연 고사(枯死)했다고 한다. 자신과 함께 자란 나무라 애정이 무척 컸으며, 지금도 가끔 군산에 가면 슈퍼가 있던 공터에서 그리움을 달래고 온다는…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댓글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내내 쓸쓸하고도 따뜻한 감정이 회오리쳤다.



그리움은 때론 쉼터가 된다

우리 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길 쪽에는 가게와 내실이 있는 신축 건물이 있었고, 안쪽에는 오래된 집과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뒤편으로는 작은 마당과 창고,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신축 건물은 아버지께서 직접 지으셨다. 우리는 신축과 구축을 ‘가게’와 ‘안집’으로 구분해 불렀다. 장사를 위해 부모님께서는 하루 종일 ‘가게’가 있는 신축에서 지내셨고, 누나와 나, 그리고 동생은 ‘안집’에서 지냈다.

고작 몇 발짝밖에 되지 않는 작은 마당이었지만 마당은 ‘가게’와 ‘안집’을 구분해 주었다. 늘 가게 일이 바빠서 부모님께서는 안집으로 건너오는 일이 드물었기에 안집은 우리들만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전쟁터이기도 했다. 연년생이었던 누나와 나는 거의 매일 싸웠다. 그때마다 동생은 전황을 살펴 가며 승기가 높은 편에 붙었다. 그러다 가끔 눈치 보는 것이 지겨웠는지 엄마에게 싸운다고 일러바치기도 했다. 물론 나는 그런 동생을 박쥐 같은 놈이라며 가만두질 않았다. 싸움 말리는 것이 지겨울 법도 한데, 동생은 경찰이 되어서 지금까지도 주취자들의 싸움을 말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일곱 살 때쯤, 뒷마당 재래식 화장실 옆에 갑자기 내 키보다 훨씬 큰 나무가 나타났다. 나는 아버지께 나무를 심었는지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동나무가 홀로 자란 것 같다며 “예전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고,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었다”는 말씀하셨다. 오동나무는 딸 시집갈 때 가구를 만들어 보내는 데 사용하고 소나무는 죽을 때 관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누나 스타일로 봐선 가구는 사서 쓸 게 뻔하니, 어쩌면 저 나무는 내 관짝이 될 확률이 높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누나는 전공으로 가구디자인 학과를 선택하더니 결혼할 땐 화장대를 직접 만들어 신혼 가구로 사용했다. 재료는 오동나무가 아닌 MDF였다.

오동나무는 ‘잭과 콩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멀리서도 지붕 위로 봉긋 솟은 나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오동나무는 포플러, 버드나무 등과 같은 ‘속성수’로 생장이 무척 빠르다고 한다. 10년 정도만 자라면 목재로 쓸 수 있다고 한다. 나무가 지붕을 덮고서는 더 이상 위로 자라지 않았다. 대신 옆으로 퍼지면서 몸집이 굵어졌다. 어떤 나무든 쑥쑥 자라는 건 무척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이면 나뭇가지가 지붕을 부술 듯 때린다는 것이다. 동생과 나는 재래식 화장실 옆이라 나무가 똥물 먹고 빨리 자란다는 나름 합리적인 추론 끝에 아버지께 화장실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화장실과 나무는 건장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누나와 나는 고향 집을 떠나 도시로 이사를 했다. 도시의 자취방에서는 천둥·번개가 쳐도 지붕을 두드리는 나무 따위 없었다. 대학 생활은 재미있었고, 자취 생활은 바빴고, 아르바이트는 힘들었다. 도시의 삶은… 그랬다. 더 이상 오동나무는 우리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모든 사내가 그렇듯 입대했고, 수년 만에 제대해서 고향 집에 갔다. 지붕을 누르던 커다란 오동나무는 이미 사라졌고 하얀 밑동만 덩그러니 남았다. 일부러 제대 일에 맞춰 베어 낸 것인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하얀 밑동을 보니 시원섭섭했다. 미친 듯이 지붕을 때리더니 꼴좋다 싶다가도 겨울이면 찬 바람을 막아주는 바람막이기도 했고, 한여름이면 커다란 잎으로 뙤약볕을 막아주는 그늘이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누나와 나 동생 그리고 부모님까지 차례로 고향 집을 떠나 각자의 삶을 꾸려나갔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수십 년을 도시에서 살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옛집은 이제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서 근처의 아파트로 모셔야만 했다. “그래도 직접 올린 집인데 아쉽지 않아요?” 아버지께 물었다. “…아파트가 편해. 그리고 내가 지붕을 잘 못 얹어서 아무리 고쳐도 비 오면 가끔 물이 새” 쿨하다 싶었는데, 일종의 ‘던지기’였다.

아버지 댁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옛집’을 지나야 한다. 주인이 바뀌면서 새로 달린 커다란 간판이 낯설긴 해도 ‘가게’는 옛 모습을 담고 있다. 놀이터와 전쟁터를 겸했던 ‘안집’과 오동나무가 있던 ‘뒷마당’은 시멘트로 깔끔하고 단단하게 다져졌다. 호랑가시나무로 둘렸던 낮은 울타리는 높고 튼튼한 벽돌 담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흔적조차 없는 그 자릴 어슬렁거리다 보면 헛헛한 마음이 위로된다. 기억 속 그곳에는 여전히… 하루가 멀다고 싸웠던 원수 같은 열두 살의 누나가 있고, 박쥐라며 아홉 살 동생을 오동나무에 묶어버린 열한 살의 반인권적이었던 아이가 있고, 그 철없는 아이를 혼내던 젊은 사내가 있고, 풋풋하고 건강한 여인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내려 발버둥 치다 멘탈이 바스러져도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보면, 다시 다음 라운드에 올라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렇게… 그리움은 때론 쉼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