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의 시간

대개의 집안이 그렇듯 매년 음력 시월이면 시제봉향(時祭奉享)을 한다. 어렸을 적 시제(時祭)를 모시는 날이면 동네가 떠들썩했다. 하지만 근래는 서른 남짓의 문중들만이 참석하곤 한다. 생활양식이 변화하고 세대가 바뀌면서 시향(時享)에 참여하는 사람이 자연스레 줄어든 것이다. 고향에 남은 문중마저도 몇 안 돼서, 돌아가며 시제 상을 준비하던 유사(有司) 또한 끊긴 지 오래다. 그런데도 시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문중 일을 도맡아 하고 계시는 큰아버지 때문이다. 종가에서조차 놓아 버린 일을 당신의 사명이라 생각하시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시제는 오가는 동안 고속도로에서 겪는 고통만 빼면 나름 괜찮은 쉼표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웬만큼 바쁜 상황이 아니라면 참석하고 있다.


한 번씩 몰아치는 산바람이 너무나 청량해서 날 선 칼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코발트 빛 강릉 바다를 뒤집어엎어 놓은 듯 푸르고 깊었다. 정오쯤 묘제와 산신제가 끝나자, 집안마다 성묘하기 위해 문중 산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 초록과 갈색뿐인 겨울 산은 이내 알록달록한 등산복과 아이들의 웃음으로 채워졌다. 우리 가족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모신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준비해 온 음식과 술을 올렸고, 그리움의 절을 올렸고, 잘 살고 있음의 절을 올렸다. 빽빽한 소나무 사이를 뚫고 들어온 햇살이 묘소 주변으로 낮게 깔렸다. 포근한 날씨 덕분에 여유 있게 음복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노랑나비 한 마리가 묘지 위에 앉았다. 어느 책에선가(?) ‘노랑나비의 비행’을 아일랜드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음을 알려주는 몸짓’이라는 글을 본 적 있다. 나는 허겁지겁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나비는 주변을 몇 번 돌더니 이내 사라졌다. 날갯짓이 힘찬 것이 춥지도 않나 보다.


나비의 시간

어머니 돌아가신 지 삼 년째다. 꿈에서라도 뵙고 싶었지만, 단 한 번을 찾아오지 않으시더니 이제 용서하시는 건가 싶었다. 이생의 그리움과 원망, 걱정과 미움. 고통뿐인 질곡의 껍질을 모두 버리고… 오직 사랑의 기억만 간직한 채 나비의 시간 속으로 자유롭게 날아갔으면 한다. 천상의 날개옷을 활짝 펴 허공을 황홀하게 훔쳐냈으면 한다. 날갯짓 품으로 오래된 우주를 하나씩 삼켰으면 한다.

겨울을 맞는 11월의 어느 날. 기분 좋은 소풍 길에 울컥한 만남이었다.


나비의 시간 - 김애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