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 또 전화가 왔다. 병세가 나빠져서 한 번 와야 할 것 같다는 것이다. 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을 뒤척이던 아버지께서 손짓으로 가래를 뱉고 싶다는 신호를 보냈다. 재빨리 티슈를 받치자, 마른기침과 함께 힘겹게 가래를 뱉었다. “힘들다… 살아 있는 게.” 한숨처럼 뱉어낸 말에, ‘그런 생각 마시라’는 말이 혀끝을 맴돌다 사라졌다. “미안허다. 이런 말이나 허고….” 당신도 모르게 터져 나온 심정을 주워 담으려는 듯 바로 사과하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 비 포유 me before you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이명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불을 켜지 않은 채 거실로 나와 TV를 켰다. 무심코 리모컨을 누르다가 익숙한 영화 포스터에 시선이 머물렀다. ‘미 비포 유(Me Before You)’. 전신마비 환자와 그의 간병인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는 영화였다. 그 물음을 따라가던 중 생각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 ‘해지’할 수 없는 이 삶이 새삼 부조리하게 다가왔다.

삶이라는 구독 서비스는 초반에 훌륭한 콘텐츠를 제공한다. 건강한 신체, 넘치는 호기심, 불타는 열정 같은 ‘오리지널 시리즈’에 우리는 밤새 열광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서비스가 노후화되면, 콘텐츠는 과거의 지루한 재방송으로 채워지고 시스템은 잦은 오류를 일으킨다. 결정적으로 이 서비스에는 ‘구독 해지’ 버튼이 없다. 설령 존재한다 해도, ‘사회적 합의’라는 명분 아래 철저히 숨겨져 있다.

의식은 희미하고 육체는 겨우 숨만 쉬는 호스피스 병동은 콘텐츠가 모두 소진된 채 무한 로딩 중인 스크린과 같다. 현대 의학은 ‘구독 기간’을 늘리기 위해 어떻게든 서버를 유지하려 애쓴다. ‘살아 있는 게 힘들다’는 아버지의 한마디는 ‘삶’이라는 지긋지긋한 구독 서비스에 대한 절박한 별점 리뷰였다. 이 형편없는 서비스를 해지해 드릴 수 없는 나는 어떤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듯, 죽음도 축하받을 수 있지 않을까?’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영화 ‘미 비포 유’에서 윌은 루이자에게 “이것은 내 삶이고,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단순히 고통 때문에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존엄사 논쟁의 찬반을 떠나, 각자의 삶에 대한 주체적 선택권의 문제다.

좋은 디자인은 무엇을 더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는가에 의해 완성된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핵심만 남겨 삶을 완성하는 것. 그런 관점에서 웰다잉은 죽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마지막 ‘편집권’을 행사하는 일이다. 언젠가 내 스크린이 하얀 천장만을 비추며 무한 로딩에 빠진다면, 그때 나는 내 손으로 전원 버튼을 누를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유일한 편집자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권리가 아닐까.


귓가에 속삭이는 말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맞잡은 손으로 내 체온이 전해질 수 있을까. 소멸해 가는 아버지의 시간 속에서, 내가 보내는 이 모든 감각 신호가 어떤 의미로든 읽히고는 있을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있지만, 이 ‘곁’이 정말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없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함께 한다는 것은 깊은 인내를 요구한다. 인내의 시간은 입을 무겁게 만들고, 짙어진 침묵은 존엄을 갉아먹는다. 시간을 늘릴 수도, 아픔을 덜어줄 수도 없다. 기도도, 위로도, 손길도 더 이상 생명을 붙들지 못한다. 생을 붙들려는 마음조차 잔혹함이 되어버리는 지금, 사랑이 가장 무력해지는 시간이다.

무엇도 할 수 없고, 무엇을 해도 부족하고, 무엇도 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지금— 나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