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동트기까지 사십 분 정도 더 남았지만, 날은 이미 충분히 밝았다. 어찌나 밝은지 알람을 설정해 놓지 않아도 눈이 절로 떠지는 계절이다. 서둘러 씻고 카메라와 펜 몇 자루 챙겨 집을 나섰다. 전날 밤, 문득 선암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가야겠어’까지는 아니었고,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 같은 생각이라면…’ 정도랄까.

예전과 달리 요즘 대개 이렇다. <그날>이, 건강검진이나 자동차 검사 같은 것처럼 좀 ‘귀찮은’ 일이 아니라, 휴식이나 여행 같은 ‘즐거운’ 일이라 해도 캘린더에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어서 빨리 <그날>을 해치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모임 같은 것도 웬만하면 ‘생각났을 때, 가능한 선’에서만 갖곤 한다. 서로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미리 약속을 잡고, 혹시라도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약속을 지키고자 요리조리 머리 쓰고, 몸 쓰는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래서 마음 가는 때에 몸을 움직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일 돼요? 그래, 그럼 내일 봐요.”

예상보다 빨리 승주에 도착했다. 휴게소를 들른 시간까지 포함해서 네 시간이 넘지 않았다. 승주 나들목에서 선암사 주차장까지는 차로 십 분 정도 걸렸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지 주차장에는 대여섯 대의 차량만이 주차되어 있었다. 그늘이라곤 1도 없고, 햇빛을 하루 종일 정통으로 받을 만한. 가장 가깝고 널찍한 곳에 주차했다. 유월의 햇살도 제법 따가워서 산사에 다녀올 때면 차는 노릇노릇 잘 구워져 있을 것 같았다. 예상되는 ‘뜨거움’은 다녀와서 그때 고민하기로 했다. 귀찮음이 지혜를 지배하고 있다.

요금소로 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태 선암사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고? 내가?’ 정말이었다. 성능 좋지 않은 기억이지만 박박 긁어 끄집어내 보았다. 눈앞의 모든 풍경이 낯설다. 혹시 하는 마음에 걷다 말고 근처 ‘송광사’를 검색해 보았다. 사진을 보니 거긴 뭔가 아스라한 기억의 찌꺼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거기에 갔었나 보네’

길 건너 요금소 창문에 ‘무료입장’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멀찍이 서서 정말 무료인가 하는 의심에 주저했다. 마침 안에 있던 분이 나오길래, 아닌가 싶어 주머니 속 지갑을 만지작 거렸다. 길건너 그분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분은 내 눈을 피해 문 앞에 있던 빗자루를 집더니 잽싸게 요금소 안으로 들어갔다. “자꾸 와서 묻지 마세요. 정말 무료라고!”라는 함축적이고 암묵적인 몸짓이었다.

선암사로 가면서 다시 또 검색. ‘선암사 관람료 – 국가지정문화재의 소유자가 관람료를 감면하는 경우, 정부나 지자체가 해당 비용을 지원하도록 문화재 보호법이 개정됨에 따라 2023년 5월부터 관람료 없이 무료로 입장’…이 가능했구나….

궁금하면 오백 원이 아니라, 궁금한 건 인터넷으로…. 사람보다 인터넷이 더 가까운 세상이라니.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淨界) 라는 글귀가 새겨진 장승이 길 양쪽에 우뚝 서 있다.

길 양쪽에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淨界)’라고 씌어있는 키 큰 장승이 눈에 들어왔다. 곧고 매끈한 하얀 돌로 만들어진 이 장승들은, 뭐랄까… 이태리 수트를 입은, ‘3대 500’ 정도는 우습게 치는, 헬스 보이 같달까? 있을 자리 잘 못 잡은 듯한 이 장승이 궁금해서 또 검색해 보았다.

장승은 두 가지 버전이 더 있었던 모양이다. 1904년 세웠다는 1대 나무 장승은 이젠 썩어서 선암사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고, 1987년, 목공예 장인에 의해 복원되었던 2대 나무 장승도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파손된 것 같다. 그리고 현재의 돌 장승을 2018년에 세웠다고 한다.
음… 어울리지 않아.

장승을 지나자 둥근 모양의 아치형 다리 ‘승선교’를 만날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무지개다리 ‘홍예교’다. 두부처럼 자른 홍예석을 반원으로 차곡차곡 세워 틀을 잡고, 양쪽과 상부에는 막돌로 석축을 쌓았다. 반듯한 홍예석과 제멋대로인 막돌의 대비가 흥미롭다. (저게 뭔가 싶은) 홍예 천장의 용머리를 제외하곤 어떠한 장식도 없었다. 심지어 다리 위에는 난간조차 없었다. 이렇듯 투박한 승선교는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속세의 매끈함과 반듯함에 지친 눈과 마음을 정화해 주는 듯했다.

개울로 내려가 승선교를 바라보면 홍예 너머로 ‘강선루’라는 이름의 누각이 보인다. 좀 더 왼쪽으로 가서 승선교와 강선루를 함께 담고 싶었지만, 먼저 촬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냥 올라왔다.

기와에 소망을 적어 기원하는 기와불사

‘삼인당’ 연못을 지나 ‘일주문’에 들어서자,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기와 불사가 늘어섰다. “한 장 올리고 가세요”라는 말을 흘려듣고 지나쳤다가 찝찝함에 다시 돌아섰다. 기와를 받아 들고 돌마루에 앉았다. 딱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기부라는 생각에 별 고민없이 이름 석 자만 올리려다 남들 쓰는 것처럼 가족이 뜻하는 바 이루길 바라는 내용을 적었다. 종교 혹은 믿음의 ‘있고 없음’은 차치하더라도 신이, 절대자가 – 행복, 성공, 건강, 합격 따위 들어줄 리 만무하다.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기왓장을 올리는 건, 자기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것일 테다.

나는 다시 기와 한 장을 더 받았다. 가진 욕심 끝이 없어 늘 괴로운 마음 달래기 위해서 – “오늘 하루가 기대만큼 근사하지 않았더라도, 내 맘이 그런 오늘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하는 당부를 얹었다. 내가, 내게. 하는 말이 무슨 위안이 될까 싶었지만, 다른 이의 바람들과 함께 놓고 보니 한결 마음이 나아지는 것 같…. 나아졌나?!  그래, 한결 나아졌다. 나아진 걸 거야.

선암사 대웅전

강당 건물인 ‘만세루’ 앞에는 동서로 놓인 두기의 삼 층 석탑이 있었고, 그 중앙에 대웅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세루에 서서 바라본 대웅전은 생각만큼 화려해 보이지는 않았다. 돌로 올린 기단은 상하좌우 반듯하게 다듬었을 법도 한데 윗면만 평평하게 맞추고 자연석 그대로 살린 것 같았다.

지붕 또한 눈에 띄는 장식 없이 조계산 능선을 따라 단아하게 흘렀다. 추녀 끝에 달린 자그만 풍경이 소박함을 더하는 느낌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들어오는 입구에 사천왕상도 없었던 것 같다. 대웅전 내부를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려다 기도에 방해될까 싶어 ‘지장전’ 뒤뜰로 발길을 옮겼다.

선암사 대웅전에서 기도를 올리는 스님

지장전 뒤뜰에 앉았다. 양손을 뒤로 짚어 몸을 젖히고 양발은 앞으로 쭉 뻗었다. 바람이 지나는 길인지 시원함이 끊이질 않았다. 땀에 젖어 축축한 등을 말리기에 더없이 좋은 명당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고개 돌려 대웅전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나무색과 한 몸이 된 빛바랜 단청이 꽤 근사했다. 천년의 시간을 용케도 버텼다. 처마를 받든 공포(栱包)는 화려하고 섬세했다.

<조선경국전>에 정도전은 “(궁궐은)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했다. 사찰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가 말한 ‘아름다움’과 선암사의 ‘아름다움’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산세는 검소했고, 계곡 따라 펼쳐지는 절경은 누추하지 않았다. 산자락 따라 흐르는 지붕은 단아했다. 스란치마 끝단 같은 단청은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천년고찰 선암사가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팔상전’을 끼고 ‘각황전’이 있는 얕은 오르막길에는 돌담을 따라 홍매화가 늘어섰다.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에 이곳을 찾았다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겠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선암매’라 불리는 토종 매화나무는 ‘천불전’ 와송과 함께 수령이 약 육백 년 정도라고 한다. 헤아리기 쉽지 않은 긴 세월은 철갑 같던 껍질을 쩍쩍 갈라지게 했고 큰 가지도 제 몸 가누지 못할 만큼 휘게 했다. 하지만 아직 그들은 푸른 잎을 품고 있었고, 고고함 또한 아직 잃지 않았다.

오십 년도 차고 넘치는데, 육백 년이라….
사람이, 사람이… 기쁨과 영광의 태평연월, 아픔과 절망의 질곡이 반복되는 육백 년. 그 시간을 살아야 한다면 정신이 온전할 수 있을까 싶다.

그 시간, 그 세월… 나무니까 버텼다.

선암사 다람쥐

염주를 목에 건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는 ‘일주문’ 부근을 제외한 경내 이곳저곳에서 다람쥐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다람쥐는 가까이 다가가 카메라를 들이대도 도망치지 않았다. 눈치 보며 매실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자세히 보니… 녀석, 웃는 상이다. 그렇다고 심장 뛰게 웃는 건 아니었고 뭔가 실실 쪼개는 듯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웃은 거니까! “네가 웃으니 나도 웃는다.”

시간 재지 않고 느긋하게 둘러보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선암사 해우소 <뒤깐>을 경험해 보기로 했다. 발을 뗄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바닥을 지나 뻥 뚫린 널빤지 앞에 섰다. 저 아래 화장실 바닥까지 3미터가 넘으려나? 고소공포증을 지닌 탓에 오금이 저렸다. 덕분에 소변도 수월하게(?) 지렸다. 화장실 냄새가 아예 없는 건 아니나 푸세식(?)임에도 비교적 냄새가 덜했다.

번뇌와 망상을 저 깊은 똥통 아래로 떨구라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떨구자고 떨굴 수 있었다면 갑남을녀 모두 진즉에 번뇌를 해탈해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선암사 뒤깐에서 번뇌를 눴다든지 하는 ‘있어빌리티’를 실연해보고 싶었으나, 특별할 것 없는 범인(凡人)이라 그저 발을 헛딛거나 휴대전화를 떨어뜨리는 일 없이 무탈하게 용변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선암사 해우소 '뒤깐'에는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 시가 붙어있다.

저는 마침 소변이 보고 싶어 해우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오의 맑은 햇살이 엷게 해우소 안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데다 아래가 너무 깊어 혹시 발이라도 헛디뎌 떨어지기라도 할까 봐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시선이 닿는 곳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인 낡은 종잇장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대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 번뇌와 망상도 미련 없이 버리세요.’ 저는 그 글을 읽는 순간, 분뇨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은은히 나는 선암사 해우소 안이 마치 내 늙은 어머니의 품 안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니, 부처님의 품속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 소변을 몸 밖으로 버리듯 지금까지 내가 지녀온 온갖 욕심을 다 버리는 거야. 내 욕심에서 모든 고통이 시작되는 거야. 욕심은 이런 소변에 불과한 거야’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변을 보고 해우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우소 앞에 한참 동안 쭈그리고 앉아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그동안 제 가슴속에 웅크리고만 있던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남의 눈치만 보던 모든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 울음은 이십 대 때 동해의 푸른 바다를 보고 울었던 그런 낭만적인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말 못 할 고통에서 오는 울음이었습니다.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울음, 내 사랑이 전해지지 못하고 증오로 변질되어 되돌아오는 고통에서 오는 울음이었습니다.

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그러자 가슴이 시원해졌습니다. 몸속의 소변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소변까지도 몸 밖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간 듯 마음이 가뿐해졌습니다

<정호승 산문집 –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중에서>



선암사에서 만난 부자. 아들인 듯한 사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른다.

아버지로 보이는 어르신이 아장아장 걷는다. 아들인 듯한 사내는 행여라도 넘어질까 봐 손을 꼭 붙잡고 발을 맞췄다. 걷는 방향이 같아 뜻하지 않게 앞서 걷는 부자(?)의 대화를 엿 듣게 되었다.


“힘들어요?”
“…”
“저쪽으로 천천히 조금만 더 올라가 보게요.”
“…”
“일단 올라가 보고, 정 힘들면 쉬어요.”
“…”
“차를 이쪽으로 가지고 올 테니까”
“…”
“일단 가 보게요.”
“…”

아마 반백 년 전에도 그들은 지금처럼 손 꼭 붙잡고 비슷한 대화를 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땐 서로의 입장은 바뀌었을 테고….

나는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말 못 할 고통에서 오는 울음.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울음, 내 사랑이 전해지지 못하고 증오로 변질되어 되돌아오는 고통에서 오는 울음을 펑펑 쏟아내자 마음속의 소변까지도 몸 밖으로 시원하게 빠져나간 듯 마음이 가뿐해졌다”는 시인처럼 오줌 싸고 펑펑 울 용기는 없다.

“아장아장 걷는 애들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안 좋아요. 삼십 년 후에 쟨 어떤 짐을 지고 살아갈까? 어떤 모욕을 견디며 살아갈까? 나니까 견뎠지. 그 어떤 애도 그런 일은 견디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난 태어나서 좋았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아니요.” 
<나의 해방 일지>

살다 보면 굽이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인생이 왜 이따위인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란 푸념도 하곤 한다. 그럴 수 있다. 정말 힘드니까…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건, <손을 내밀어 힘들다고 말하는 용기를 갖는 것, 그리고 힘들어 내민 손을 잡아주는 여유를 갖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저들처럼 손 꼭 잡고 걷는다면 이 돌부리 천지인 자갈밭 같은 인생을 그나마 버티며 지날 수 있지 않을까.

편백나무 빽빽한 숲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누웠다. 바람이 상쾌했다. 아디다스 모기떼가 장난 없다. ‘네놈들이 건넨 손 다 잡아주마. 양껏 빨아라.’ 싶었지만, 서둘러 도망쳤다. 면벽 수행하듯 말 섞을 일 적다 보니 시답지 않은 뻘글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