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원래 말씀이 없는 분이고, 어머니는 길가 돌멩이와도 이야기를 나누는 분이었다. 아마 대학생 때였지 싶다. 가져갈 짐이 많으니 와달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집 근처 시장으로 나섰다.

시장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친구(?)분과 말씀 중이셔서 나는 낄 타임 각 재며 쭈뼛거렸다. 엄마는 친구분과 계속 말씀을 나누면서 턱으로 발아래 까만 비닐봉지 네댓 개를 가리키셨다. 나는 봉지들을 양손에 야물게 감아 들고 두 분 뒤를 따랐다. 두 분의 대화는 삼거리가 나오기 전까지 끊이질 않았다. 이윽고 삼거리가 나오자 두 분은 각자 제 갈 길 가셨다. 나는 눈인사조차 없이 쿨하게 갈라선 두 분의 관계가 궁금했다.

“누구셔?”
“모르제”
“몰라?”
“몰라. 그냥 자기 아들이 목포 산다 해서….”

엄마께서 그분과 일면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목포와 무슨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늘 그렇게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 묻고 들으셨다. 그런 분이 하루에 겨우 서너 마디 할까 싶은 놈을 자식으로 두셨으니 살아생전 오죽 답답하셨을까 싶다.

꽃과 사람. 그리 좋아하시던 분이 십수 년을 병원 계단만 오르셨으니, 그 몸 그 맘 얼마나 힘드셨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예쁜 풍경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면 그제야 엄마 생각이 번뜩 들고는 했다. 죄송한 마음에 전화드리면 늘 엄마는 “응~ 네 아버지 잘 계신다”라고 하시면서 당신도 잘 지내니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보내라 하시곤 했다.

돌아가시던 날 관짝 끄트머리를 붙잡고 그리 후회했건만, 나는 여전히 홀로 남은 아버지를 멀리 모시는 불효 중이다. 문득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굶어 죽지 말라고 나라에서 때마다 밥 챙겨주고, 추우면 보일러 틀고, 더우면 에어컨 틀면 된다. 네 엄마 묘소도 걸어서 몇 걸음이고, 형님 계시고 동네 친구들도 있는데 뭔 걱정 있겠냐? 니들만 잘살면 된다. 나는 암시랑토 안 하다.”라고 늘 괜찮다고 하신다.

걱정하실까봐 다친 걸 숨기고 몇 달이 지나서 뵙고 지금은 괜찮다며 말씀드렸더니 “‘”바쁘다고 몇 달을 얼굴 안 비칠 놈 아닌데, 이놈 뭔 일 있지 싶구나” 하셨단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암시랑토’ 않으니 괜한 걱정 말라시는 말씀에 붙여 그만해서 다행이고 ‘고맙다’ 하셨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드릴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길 조심할 테고, 열심히 살게요. 아버지.



여행 가는 딸아이 귓등에 대고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했더니 ‘누구처럼’ 어디 가서 뼈 부러트리고 다니진 않으니 걱정말라는 핀잔만 돌아왔다.

음.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