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봄은 너무나도 짧았다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했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유신체제가 그렇게 막을 내린 것이다.
이듬해 1980년 봄 대한민국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시절을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서울의 봄’이라 불렀다. 하지만 1980년 5월 18일 전두환의 계엄령 선포로 이제 갓 꽃망울을 틔우려는 민주화는 신군부의 총칼에 무참히 꺾이고 말았다.
민주화를 향한 긴 겨울은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와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 때문이었다. 민주화의 봄은 너무나도 짧았다.
Pražské jaro(프라즈스케 야로) ‘프라하의 봄’은 1968년 1월 5일부터 8월 21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1968년 1월 5일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파 알렉산데르 둡체크가 집권하면서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가 회복되었다. 또한 국가 주요 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은 권력독점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동시에 경제 개혁과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 도래하는 듯 했으나 같은 해 8월 21일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 회원국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서 개혁을 중단시켰다.
영화 서울의 봄
12.12 군사 반란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 개봉 소식을 듣고 극장을 찾았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면서 객석을 훑어보았다. 스물 혹은 서른? 정도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몇몇의 관객이 더 들어오긴 했지만, 절반 이상이 빈자리였다. 개봉 첫 주 토요일 오전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영화는 등받이에 파묻혀있던 내 허리를 바로 서게 했고, 끼웠던 팔짱을 풀어 주먹을 쥐게 했다. 현실 속에 버티고 섰던 나를 79년 겨울로 잡아끌었다. 불안, 기대, 슬픔, 감동, 분노, 허탈…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서울의 봄은 역사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하다면 꽤 복잡하고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천만 영화’는 다양한 연령대에 흥미와 공감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서울의 봄이 천만 영화의 반열에 오를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면에서 꽤 잘 만들어진 수작임은 분명하다.
우리 세대는 독재의 시대와 심판의 시대를 모두 경험했다. 그럼에도 또다시 새로운 유형의 독재를 맞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법과 원칙’은 개소리가 된 지 오래고, 최근 등장한 ‘원칙과 상식’은 방향을 잃고 제 주인 뒷다리를 물어뜯는 중이다. 인터넷에 회자하는 ‘국난 극복이 특기인 국민’이라는 농담에도 웃을 수 없을만큼 비참한 현실이다.
훗날 누군가 ‘그때 당신은 무얼 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면 우리는. 그리고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앨프리드 마셜의 말을 잠깐 빌려 본다. ‘차가운 머리’로 오늘 우리가 어떤 역사 위에 있는지, ‘뜨거운 가슴’으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