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레드맘바 만년필 사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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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시간이 흐르며 바뀌곤 합니다. 예전에는 손도 대지 않던 나물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집어 들게 되는 것처럼, 취향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흐름과 맥락 속에서 점차 정돈되는 무언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예민하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대체로 몸에 직접 닿는 것들에 대해서입니다. 모자, 셔츠, 바지, 속옷, 양말, 신발 등.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불편함은 감추기 어렵고, 수선비가 본래의 가격을 넘는 경우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파카는 그립이 너무 얇고 미끈거리며, 라미 2000 또한 미끈거립니다.
필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연필은 ‘스태들러’, 샤프는 ‘펜텔’. 그러나 만년필은 아직도 방랑 중이었습니다. 스펙이나 브랜드보다 손에 쥐었을 때의 감각이 더 중요하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디자인은 마음에 드는데 미끄럽거나, 밸런스가 완벽한데 필감이 지나치게 부드럽거나, 손가락이 닿는 위치에 나사선이 걸려 쓰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습니다.


트위스비는 캡을 끼웠을 때 무게 중심이 뒤로 너무 쏠리고, 사파리는 그립의 엣지가 부담스럽습니다.


몽블랑 149는 너무 두꺼워 장시간 필기가 어렵고, 플래티넘은 나사산이 날카롭고 위치 또한 손마디에 걸립니다.
흔히 그립(Grip) 감(感)이라고 하죠. 필기를 오랫동안 하기 위해서는 손에 쥐는 맛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디자인이나 가격은 차치하고라도 길이와 무게 중심, 두께와 촉감, 필(筆) 감(感) 등 고려해야 할 것이 많고 이것들을 모두 충족하는 펜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펜을 써본 것은 아니지만 들이고 내보내기를 반복했었습니다. 너무 작고 가늘어서 불편하기도 했고, 반대로 너무 커서 오래 사용하기가 어려웠던 펜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펜은 사이즈가 정말 좋았지만 너무 미끈거려서 손에 힘을 주고 써야 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스크루 캡 방식의 펜은 쥐는 지점에 나사산의 낙차가 커서 손가락이 아픈 경우도 있었고요. ‘아! 이건 완벽한 밸런스와 그립이야’라고 감탄했지만 필감(筆感)이 너무 미끈거려 만족스럽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Aurora Black Mamba Ⓒ Aurorapen.it
그런 이유로 데일리 펜을 진지하게 찾기 시작했고, 오로라의 맘바 시리즈 – 그중에서도 최근에 나온 한정판, ‘레드맘바’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오로라 88 시리즈를 베이스로 한 이 펜은, 그립감과 오로라 특유의 사각거리는 필감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오로라 레드맘바 한정판
오로라 레드맘바 만년필 사용기를 간략하게 작성해 보겠습니다. 2022년 말, 오로라는 레드 맘바 한정판을 출시했습니다. (전 세계 888개 한정입니다만, 다행히 아직까지 판매중입니다)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은 준 건 역시 그립감이었습니다. 물론 오로라 특유의 사각거리는 필감도 한몫했고요. ‘부드러운 것이 최고다’라는 말에 현혹되어, 최근 몇 년은 부드러운 펜촉만을 찾아 헤매었는데, 제 취향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맘바 시리즈는 기존 오로라 88 모델을 베이스로 하고 있습니다. 오로라 88을 처음 시필했을 때 딱 감이 오더군요.

제품 구성
레드맘바는 슬리브 겉박스와 자석식 하드 케이스에 보증서와 리플릿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실물을 처음 봤을 때는 채도 낮은 붉은색이 다소 플라스틱 같아 보였습니다. 오롤로이드라 불리는 소재는 셀룰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이며, 사진보다 실물이 더 밋밋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배럴에 가공된 기로쉐 패턴 덕분에 손이 건조하거나 땀이 나도 미끄러지지 않는 점은 만족스럽습니다.

Aurora 88 Ⓒ iguanasell.com
그립감
배럴 소재를 한정판에는 *오롤로이드를 사용하거나 일반 모델에는 거의 레진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실물이 깡패인 경우가 많은데 레드 맘바의 첫인상은 그냥 중국산 다라이 빨강 플라스틱 제품 같은 느낌입니다.
*오롤로이드 : 오로라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특수한 소재라고 하는데 아마 셀룰로이드 소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예쁘게 한번 찍어줬습니다. 사진에 속으면 안 됩니다. 그냥 채도가 낮은 빨강 다라이 레드입니다. 레진 소재 배럴에는 *기로쉐(Guilloche) 패턴이 가공되어 있습니다. 싸구려틱 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기로쉐 패턴이 다른 펜과 다른 우수한 그립감을 제공해 줍니다. 손이 건조하거나 땀이 나더라도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기로쉐(Guilloche) : 새끼줄 꼰 듯한 문양
시필 때 가장 유심히 테스트했던 부분은 그립부였습니다. 스크루 캡(screw cap) 방식의 펜은 나사산으로 인해 손가락이 아픈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맘바는 그립부의 길이가 긴 편이라 나사산이 좀 더 중앙에 위치해 있고, 날카롭거나 높지 않아서 중지에 압박이 덜하며 손에 걸리더라도 별다른 이질감이 없었습니다.
배럴과 그립의 연결 부분도 걸리는 느낌도 없습니다. (두 제품을 비교하기에 체급차가 있지만) 플래티넘의 센추리 같은 경우는 단차 모서리가 일직선으로 떨어지고, 오로라는 라운드 형태로 떨어집니다. 이로인해 단차의 높이는 비슷하지만 오로라가 이질감이 덜 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구성
맘바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가벼워서 장난감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때문에 중후한 맛은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장시간 사용에는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서명용’ 또는 ‘캘리용’이 아닌 데일리 느낌입니다. 무게 중심은 중앙에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캡을 씌우고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데 캡을 씌워도 무게 중심이 뒤로 넘어가지 않아서 필기할 때 뒤가 날린다든지 하는 느낌도 없어서 꽤나 안정적입니다.
잉크 충전 방식은 피스톤 필러 방식이며 충전되는 양도 크기에 비해 제법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역시나 히든 리저브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겠습니다. 히든 리저브로 인해 청소가 쉽지 않고 파손의 위험도 높다는 평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펜에는 여러 잉크를 바꿔가며 넣을 생각이 없기에 딱히 청소랄 게 없을듯싶고, 파손에 대한 부분은 그냥 운에 맡겨봅니다.

히든 리저브
오로라의 히든 리저브는 잉크가 떨어졌을 때, 노브를 살짝 열면 숨겨져 있던 잉크를 피드로 전달해 줘서 A4 용지 1~2장 정도 더 쓸 수 있다는 기능입니다. 조삼모사 같은 거죠. 애초에 10의 잉크를 넣었는데 9를 쓰면 다시 충전해야 되는 잘못된 구조입니다. 물론 이 기능을 통해서 남아 있던 1을 끄집어 낸다는 건데… 왜 이렇게 복잡해진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히든 리저브와 피드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히든 리저브는 결국, 오로라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는 ‘에보나이트 피드’ 때문에 탄생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잉크 마름에 강한 에보나이트 피드는 장점이기도 하지만, 인젝션 방식의 플라스틱 피드에 비해 가공의 어려움과 제작 단가 상승이라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잉크 마름 또한 플라스틱에 비해 눈에 띄게 성능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것은 감성의 영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플라스틱 피드에 비해 정밀한 가공이 힘든 만큼 잉크를 토해내거나 쏟아지는 현상을 개선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피드 내부로 이어지는 파이프를 만들어 충전부까지 길게 뽑아서 이를 개선했지만, 이 높아진 파이프로 인해 1만큼의 잉크가 전달이 안 돼서 강제로 끌어올리는 히든 리저브라는 기능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파이프만 튀어나와 있지 않으면 남은 1의 잉크는 자연적으로 피드로 전달될 것 같습니다.
오로라는 선택해야만 했을 겁니다. ‘에보나이트 피드를 포기하느냐? 뜨뜻미지근한 반응의 히든 리저브를 유지하느냐?’

PVD 코팅 18K 골드 닙
18K 골드 닙은 *PVD 코팅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맘바는 오로라 특유의 사각거림이 더 하는 느낌입니다. 강성의 단단한 텐션으로 인한 기분 좋은 사각거림이 일품입니다. 버터 필감만을 쫓던 시간이 너무나 아까워지는 순간입니다.
토모에리버, 미도리 노트, 어프로치 노트, 로이텀, 비세븐 용지를 사용했었고 헛발질로 인한 스트레스는 없었습니다. 잉크는 제 짝인 오로라 블랙을 넣었습니다. 구입 때 받은 잉크까지 더해 3병이나 있는 탓에 빨리 써서 없애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펜촉의 흐름이 우수하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오로라 잉크의 흐름이 좋아서 상호 보완되어 그냥 필기하기에 딱 정당한 느낌입니다.
*PVD 코팅 : 금속물질을 증발시킨 후 바이어스(Bias) 전압을 가해 표면에 물질을 증착하는 코팅 방법으로 높은 내마모성과 부식 방지가 탁월합니다.

레드 맘바를 그려 보자는 맘으로 펜을 들었다가… ‘가만보자 레드 맘바가 존재하기는 한 거야?’라는 의문에 더해 잉크도 바꿔야 한다는 귀찮음에 그냥 블랙 맘바를 끄적거려 봤습니다. 땡땡이를 채워나가는데 눈이 너무 침침하고 피로해져서 날림으로 대충 마무리했습니다.
30~40대에 라섹으로 맑고 선명한 세상을 당겨쓰는 바람에 노안이 심합니다. 한때,은퇴 후 타투이스트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이놈의 노안 때문에 애저녁에 포기했습니다. 안 보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집중하기가 어렵습니다. 왠지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ㅠㅠ


‘이게 왜 이리 비싸?’ 가격에 비해 저렴해 보이는 외관 불안한 내구성. 분명 취향 타는 외모와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상쇄하는 필감, 그립감으로 인해 데일리 만년필로서 평생 소장각입니다.
세 줄 요약
*고급 져 보이지는 않다.
*사각거리는 필감, 미끈거리지 않은 그립감이 좋다.
*파손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