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미안하다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정호승 詩 – 미안하다
독작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류근 詩 – 독작(獨酌)
영영 보지 않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니…. 그것이 진실한, 작별이라니….
현생과 내생이 다 깨도록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새로운 사랑을… 그리고 삶을 살아가라며 독하게 버림받은 체했다. 그렇게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었다. 행여 다시 뜨거워질까 겁나, 눈 뜬 모든 시간엔 찬 바람을 가슴에 담았다.
매일 같은 하얀 밤과
매일 같은 검은 아침,
나는 양손 모아 심장을 감추고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 달라고 침묵의 통성기도를 했다. 하나 후회만 가득하여 미친 듯이 온 세상에 불을 지르고 가슴 쥐어뜯고 운다. 여전히 나만 남아 있는 나를 뉘우친다.
인연 도종환
너와 내가 떠도는 마음이었을 때
풀씨 하나로 만나
뿌린 듯 꽃들을 이 들에 피웠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떠돌던 시절의 넓은 바람과 하늘 못 잊어
너 먼저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고
나 또한 너 아닌 곳을 오래 헤매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도 가없이 그렇게 흐르다
옛적 만나던 자리에 돌아오니
가을 햇볕 속에 고요히 파인 발자국
누군가 꽃 들고 기다리다가 문드러진 흔적 하나
내 걸어오던 길 쪽을 향해 버려져 있었다.
도종환 詩 – 인연
인연 –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대개의 인연은 기억조차 희미하게 스치고 지났으며, 그중 몇몇 인연은 결실(?)을 보기도 했다. 결실은 살아남은 인연이다. 우연히 옛적 만나던 자리 지나다, 가을 햇볕 아래에서 발견한 흔적. 간절히 기다리다 문드러진… 너의 것이기도 했을, 또한 나의 것이기도 했을. 그 문드러진 흔적은 살아남은 인연이다.
비록 너는 잊었더라도, 내가 잊지 않고 내가 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살아남은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