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밀스타인 기억의 캐비닛
‘보는 그림’을 넘어 ‘읽는 그림’의 세계로
일리야 밀스타인 Ilya Milstein.
맥시멀리즘 화풍에 기반한 경이로운 디테일로 순수 예술과 상업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리야 밀스타인. 그의 한국 전시 <일리야 밀스타인 : 기억의 캐비닛>이 삼성동 마이아트 뮤지엄(2023. 9. 20.~2024. 3. 3.)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일러스트 원화와 오리지널 드로잉을 포함한 121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다양한 작품 중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그만의 독보적인 스타일로 재해석한 작품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에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보는 그림’을 넘어 ‘읽는 그림’이라는 새로운 경험은 꽤 긴 관람 시간을 요구했고, N차 관람이 추가로 필요했다.
일리야 밀스타인(b. 1990)은 밀라노에서 태어나, 멜버른에서 자랐으며 현재 뉴욕에 기반을 두고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아티스트이다. 멜버른 대학교에서 순수예술을 전공했으며, 일러스트레이터로 전향하면서 그의 작품은 American Illustration and Communication Arts에서 인정받았다. 또한, Society of Illustrators에서 금메달을 수여했으며, One Club for Creativity에서 ADC Young Gun 작가로도 선정되고 뉴욕타임즈, 구글, 페이스북 그리고 최근에는 LG전자와 협업하는 등 세계적인 브랜드 및 매거진과의 콜라보로 세계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급부상한 현대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이다. 작가는 기이하고 밀도 높은 묘사의 대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나 피터르 브뢰헐(Pieter Bruegel)과 일본 목판화, 이집트와 아즈텍 상형문자 등의 요소 등 양한 영감을 기반으로 작업을 하며 독창적인 맥시멀리즘 화풍을 지니고 있다. 경이로운 디테일과 동시에 높은 가독성을 띠는 그의 작품은 순수미술과 상업예술의 경계를 넘나든다.
Le Temps,
Illustrations accompanying an article on the history of Champagne for Le Temps.
Estate, 2022. (Ptint / Original Drawing)
‘Estate, 여름’은 밀스타인이 2022년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일러스트레이터 비토리오 지아르디노(Vittorio Giardino)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했다고 한다. 그림 속 인물은 계단에 편히 앉아 섬 혹은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돌계단에 듬성듬성 비치는 햇살을 통해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A Library by the Tyrrhenian Sea, 2018.
Lovers, 2019.
Original Drawing
The World of Agatha Christie (Print | Original drawing)
전시장은 노루페인트와의 협업을 통해 각 섹션마다 작품과 조화를 이루는 컬러를 사용해서 디자인하였다. 이것은 마치 ‘일리야 밀스타인이 준비한 비밀의 방’에 초대를 받은 것 같은 느낌으로 관람의 즐거움을 더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것들의 압도적인 디테일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하고 작품 앞에 한동안 서서 그것들을 ‘보기’보다는 ‘읽게’ 만든다. 16~17세기 유럽에서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물건들을 전시했던 비밀의 방 분더캄머(Wunderkammer)에 들어와 수집품 하나하나를 감상하던 중 이국적인 책 한 권을 꺼내 들어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가는 듯한 경험처럼 말이다. 이 시각적 향연은 동시에 높은 가독성을 띠고 있는데, 작가가 본인의 캐비닛을 열어 하나씩 수집품을 꺼내어 보고 즉석에서 묘사하듯 분명하고 생생한 표현을 보여준다.”라는 전시 기획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Buffalo Check Applecross Micro Batch jacket
A panoramic illustration commissioned
by Bombay Sapphire for their English Estate gin.
New York in Summer 1983 Series
Harlem, SoHo, Upper East Side
1980년대 뉴욕의 모습을 상상한 이 작품들은 더 뉴욕 타임스 스타일 매거진의 커미션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각각의 작품은 1983년의 여름으로 구체화된 맨해튼의 할렘, 소호, 어퍼 이스트 사이드, 이스트 빌리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은 실제 존재했던 장소이며, 몇몇 유명 인사들이 함께 표현되어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1983년 여름, 할렘의 늦은 아침’에서 밀스타인은 비보잉을 비롯한 흑인 문화의 본고장인 할렘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 할렘의 아침 풍경은 활기찬 음악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모습으로 표현되며, 당시 존재했던 ‘대퍼 댄즈 부티크’나 ‘실비아스’와 같은 가게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1983년 여름, 소호의 저녁’에서는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며 부흥했던 당시의 모습을 앤디 워홀이나 장-미셸 바스키아와 같은 작가들이 저녁의 소호 거리에 모여 하루를 마무리하는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1983년 여름, 어퍼 이스트 사이드의 오후’는 상류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는 특징을 여유로운 낮 시간, 울창한 나무 사이 고급 레스토랑 과 명품 브랜드 상점, 그리고 다른 작품들과 달리 쓰레기 하나 없는 깔끔한 거리와 나비들로 채우고 있다.
Harry’s
Belgium, France, Germany, Netherlands
뉴욕에 기반을 둔 면도 상품 제조 회사인 ‘해리스’ 의뢰로 제작된 ‘상상 속’ 시리즈는 벨기에‧프랑스‧독일‧네덜란드의 도시 거리와 나라별 특징을 자신의 방식으로 위트있게 표현했다. 마치 ‘윌리’를 찾듯 작품 속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는 면도기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상상 속 : 벨기에’는 벨기에 만화가 에르제의 캐릭터 땡땡(Tintin)을 발견할 수 있다. ‘상상 속’ 시리즈는 밀스타인의 상상력과 관람객의 상상력이 만나는 공간이었다.
The Gentrifiers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미디어 뉴스 회사 쿠리어 미디어의 커미션 작품으로, 클리퍼 매거진의 기사 ‘창조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한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무엇일까?’ 에 실린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특정 지역의 성격과 부동산 가치의 변화로 기존 지역 주민들이 내몰리는 현상을 설명하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낙후된 지역을 활성화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기사 원문 중 무엇으로 ‘텅 빔’을 채울 것인가 보다, ‘텅 빔’을 어떻게 허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과밀과 소멸’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People were able to carve out a bit of emptiness for themselves. When we build new parts of cities, the question is not what can we find to fill it, but how can we allow emptiness?
The World of Hercule Poirot.
‘에르퀼 푸아로의 세계’는 애거사 크리스티 리미티드와 로렌스 킹 출판사의 커미션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에르퀼 푸아로는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시리즈 중 총 33권에 등장하는 탐정 캐릭터이다. 디테일의 장인답게 밀스타인은 4시 13분에 멈춘 시계들과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 연상되는 장난감 기차, 디오라마로 표현한 소설 속 장소. 권총, 칼, 독극물 등 여러 흉기를 숨은그림찾기 하듯 곳곳에 숨겨 놓았다. 작품 중앙에 서서 뒷짐을 지고 특유의 콧수염과 머리 스타일을 하는 인물이 ‘에르퀼 푸아로’이다. 사건에 휘말린 모든 이들을 한곳에 모아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탐정 푸아로만이 관람자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있어 묘한 긴장감을 준다.
Boats
Boatsmusic ‘s forthcoming album
St. Bartholomew’s Day Massacre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은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의 기념비적인 재상연 소식을 알리는 기사에 실린 작품이다. ‘위그노’는 16세기~17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프랑스에서 확산된 개신교 신자를 일컫는 말이며, 오페라는 두 교파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적인 사랑과 대학살 사건을 다룬다. 본작의 제목인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은 종교개혁 당시 위그노가 학살당한 실제 사건이 일어난 날이자, 오페라에서 마지막 사투가 벌어지는 날이다.
밀스타인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복장의 대비로 위그노와 가톨릭교도들의 혈투를 묘사했는데, 1836년에 초연한 오페라의 시대적 배경이 아닌 다소 현대적인 의복으로 표현했다. 이는 20세기 중반 자취를 감춘 뒤 2018년에 재상연하는 소식을 알리는 기사의 내용을 기발하고 감각적으로 전달하기도 하며, 종교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다양한 면에서 존재하는 극단적 대립도 연상시킨다.
Back to school
After Man
Ratatouille
Family Photo at Mankessim Posuban, 2021.
Limited edition of 30 giclée prints on 310gsm heavyweight German etching board.
Signed, numbered, 330mm*380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