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존 오브 인터레스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The Zone of interest)’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 절멸 수용소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작심하고 관객에게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루었던 기존 영화와 달리 유대인 학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수용소 담벼락 너머에서 생활하는 *루돌프 회스와 그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을 선택했다. 영화 내내 나의 눈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따라갔고, 귀는 담장 너머의 소음을 향했다.
나는 대체로 감정이 무너질 것 같은 순간들을 허용치 않는다. 그런 낌새가 보이면 감정의 벽을 세워서 멈추거나, 지나갈 때까지 외면하는 것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잠깐 멈출수도, 빨리 감기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꼼짝없이 영화의 마지막 십 분을 맞닥뜨렸다. 지금도 그때의 심리 상태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거나 정의하기 어렵다. 가득했던 슬픔과 함께 휘몰아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루돌프 회스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수용소를 창설하는 데 개입했고 수용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학살을 공정화하여 100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다. 약 1년간 전출갔다가 아우슈비츠로 다시 돌아와 ‘회스 작전’을 실시하여 매일 1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죽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
폴란드 마워폴스카 주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 수용소 기차역
“본인은 1941년에서 1943년까지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의 사령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2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가스로 학살하고 50만명의 유태인들은 다른 방법으로 학살했음을 선서한다. 루돌프 회스. 1946년 5월 14일.” – 아우슈비츠 학살 수용소의 사령관으로 있는 동안 유태인들을 가스 학살했다고 진술한 루돌프 회스(Rudolf Hoess)가 서명한 진술서.
루돌프 회스는 1947년에 폴란드 최고 국가 법원에 기소되어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지휘관으로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당신 손에 죽은 유대인들이 정말 죽어 마땅했나?”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이 답할 내용이 아니라고 변론했다. 그는 또한 350만 명의 학살자 중 질병으로 사망한 100만 명의 유대인들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극악하기 그지없다.
루돌프 회스는 다음 해인 1947년에 폴란드 최고 국가 재판소로부터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다. 폴란드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의 요구 및 학살자에 대한 본보기로 그의 옛 사무실이 내다보이는 특설 교수대에서 형을 집행했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처형자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홀로코스트 총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
예루살렘 재판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를 받은 홀로코스트의 총책임자로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축출 및 학살 전문가로 통했다. 그는 유대인 학살이라는 자신의 임무에 완전히 몰입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실무 총책임자 위치에 있었던 아이히만은 전쟁으로 군수품을 운송할 철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2년간 500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옮겨 학살을 주도했다.
그는 과거를 감추고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살다가 1960년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잡혔다.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자신은 ‘공무원으로서 합법적인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 직접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으므로 죄가 없다’라며 칸트의 ‘정언명령’, ‘실천이성비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다.
*정언명령 : 임마누엘 칸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어떠한 조건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 행위 자체가 선(善)하므로 절대적이고 의무적으로 행할 것이 요구되는 도덕 법칙을 말한다.
수많은 범죄자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 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악의 평범성 –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Johanna Cohn Arendt
당시 기자였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에 참석하였고, 그곳에서 아이히만을 관찰하면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으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집필했다.
한나 아렌트는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사악한 살인자라기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공무원이었다고 했다. 아렌트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히만은 전형적인 공무원이다. 그런데 한 명의 공무원, 그가 정말로 다름 아닌 한 명의 공무원일 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사람이다. 악은 타인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나타난다.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해도 무죄가 될 수 없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잘못은 ‘자기 머리로 사유(思惟)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그가 따르는 ‘절대 선에 의한 정언명령’이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지는 않는지 의문을 품지 않았고, 자기 객관화와 자기 성찰을 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행하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것은 완전한 무능이고 이것은 ‘악의 평범성’이라고 했다.
아이히만은 나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반유대주의자였다. 그는 유대인을 독일의 적으로 간주했고, 유대인 절멸을 지지했던 완벽한 나치즘의 신봉자였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에 공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들의 악이 설명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반유대주의 신념을 숨기고, 거짓으로 생각 없는 공무원 행세를 했을 것이라고 본다. 결코 머리통을 장식으로만 달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악을 선택했고, 학습했다.
악의 무리
재판장에서 아이히만은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재판관으로부터 조언을 받아 다시 증인 선서를 했다고 한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익숙한 장면이다. 얼마 전 채 상병 특검법 입법청문회에서 책임자들이 증인 선서를 거부했다. 자기 머리로 사유(思惟)하지 못하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만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스스로 사유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언어로 말하려고 노력해야 악에 물들지 않을 수 있다는 말만으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
모든 권력과 힘의 조직에는 암처럼 다양한 ‘악’이 발생한다. 그 악은 기성의 네트워크를 통해 상호작용을 하면서 ‘악의 무리’로 성장하는 현상과 구조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지금의 시스템만으로 억제하기 힘들다. 악은 무리를 지어 부지런히 학습하고 끊임없이 성장한다. 법과 제도만으로는 악을 통제할 수 없다. 악은 “니들이 어쩔 건데”라며 법과 제도를 유린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감시와 연대’만이 최종병기다.
영화 ‘1923 간토대학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