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굳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그것은 철학의 근본적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익숙한 무대 장치가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닥친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차로 출근하기, 사무실이나 공장에서의 네 시간 근무, 식사, 전차, 네 시간 근무, 식사, 잠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러한 일정은 대부분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놀라움이 동반된 이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시작된다〉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나는 이제 자살의 개념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부조리한 인간에게 어떤 해결책을 부여할 수 있을지 이미 생각해 보았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역전된다. 앞에서는 삶이 살아갈 만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인지가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삶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만큼 더 잘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의 경험, 하나의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부조리가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고 돌아서야만 사라진다. 따라서 일관성 있는 유일한 철학적 입장의 하나가 바로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이 서로 영원히 대면하는 것이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아래로 되돌아가는 그 시간, 그 짧은 휴식 시간 동안이다.<중략>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통을 향해 다시 걸어 내려가는 그 남자가 보인다. 호흡과도 같고, 그의 불행만큼이나 분명하게 되풀이되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 정상을 떠나 신들의 누추한 소굴을 향해 조금씩 빠져 들어가는 이 순간순간, 그는 그의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일상에서 우리는 ‘부조리’를 ‘부정행위’의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不條理)는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을 때 우리는 ‘조리 있다’라고 말한다. 부조리는 이와 반대의 뜻으로 조리 없는 것, 즉 통일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포스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서도 언급한 적 있듯이 우주의 만물은 ‘의미 없이’ 작동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의미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 ‘의미 없이 작동하는 우주’와 ‘의미를 부여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의 사이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
사막의 왕, 1화 모래 위의 춤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행복한 삶’을 향해, 하루, 한 시간, 일분일초를 버릴 것 없이 소중히 살다가… 문득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렇게 현타가 찾아오는 순간 – 놀라움이 동반된 이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허무하고 무의미한 부조리를 느끼게 되는 순간,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조부 투파키처럼)의미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작점이다. 부조리함을 받아들였을 때 인간은 비로소 ‘반항하는 인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같은 일을 ‘끝 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죽는 날까지 산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의 형벌’과 닮아 있다. 스스로에게 ‘삶은 나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인간이 만들어 낸 가치와 규칙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이 부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반항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삶은 완성된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Nothing matters.
Feels nice, doesn’t it? If nothing matters, then all the pain and guilt you feel for making nothing of your life goes away.
Sucked, Into, A bagel…
전부 다 부질없다는 것.
기분 좋지 않아? 다 부질없는 거면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빨려 들어갔네. 모두 베이글 속으로….
Jobu Tupaki,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수개월째 카뮈와 했던 씨름을 이젠 그만해야겠다.
‘부조리’와 ”반항하는 삶’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여전하지만, 남은 찝찝함은 다음을 기약한다.
First acknowledges how dark everything is, how meaningless it all is. Then I can be like, “Okay, now we can have a conversation, convince me why there is still beauty,” or whatever.
먼저 모든것이 끔찍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여전히 남은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Daniel k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