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일상에서 우리는 ‘부조리’를 ‘부정행위’의 뜻으로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不條理)는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을 때 우리는 ‘조리 있다’라고 말한다. 부조리는 이와 반대의 뜻으로 조리 없는 것, 즉 통일성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 포스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서도 언급한 적 있듯이 우주의 만물은 ‘의미 없이’ 작동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은 의미에 대한 열망이 가득하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 ‘의미 없이 작동하는 우주’와 ‘의미를 부여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의 사이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


사막의 왕, 1화 모래 위의 춤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행복한 삶’을 향해, 하루, 한 시간, 일분일초를 버릴 것 없이 소중히 살다가… 문득 ‘나,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그렇게 현타가 찾아오는 순간 – 놀라움이 동반된 이 무기력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허무하고 무의미한 부조리를 느끼게 되는 순간,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의 조부 투파키처럼)의미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작점이다. 부조리함을 받아들였을 때 인간은 비로소 ‘반항하는 인간’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평생에 걸쳐 같은 일을 ‘끝 없이’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죽는 날까지 산 위로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시지프의 형벌’과 닮아 있다. 스스로에게 ‘삶은 나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인간이 만들어 낸 가치와 규칙을 걷어내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이 부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반항하며 살아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삶은 완성된다.


수개월째 카뮈와 했던 씨름을 이젠 그만해야겠다.
‘부조리’와 ”반항하는 삶’이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여전하지만, 남은 찝찝함은 다음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