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퇴근 후, 서점에 들렀다. 조용하던 서점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입구 쪽으로 책장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계속 지켜보던 중, 내 시선을 느낀 직원이 말했다. “방금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어요.” 노벨상? 세상에 이런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내 입에서는 “지금 아니면 당분간 구하기 어렵겠네요”라는 질문이 튀어 나왔다. 사람이, 어쩜 이렇게 세속적일 수 있을까.ㅋ
‘직원이 재고가 3권뿐이라며 정리하던 책장에서 한 권을 빼주었다. 사실, ‘소년이 온다’를 워낙 힘들게 읽은 기억도 있고, ‘작별하지 않는다’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이라는 얘기에 일부러 멀리했던 책이었다. 그렇게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주말 동안 느리게 느리게 읽었다.
소설은 학살에 대한 책을 쓴 후, 유서 쓰기를 반복하는 경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주인공은 제주도로 향하게 되고, 그곳에서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흐름을 좇기보다 문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그들과 함께 걷는 듯한 느낌으로 문단 사이를 천천히 탐독하길 조심스레 추천한다.
젖먹이, 강요배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되새기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강렬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이 작품은 제주 4.3 사건을 중심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베트남전, 만주 독립군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아우르며 인간의 존엄과 기억의 중요성을 탐구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눈’이라는 상징적 소재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휘몰아치는 눈은 단순한 날씨 현상을 넘어 고통의 상징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눈에 파묻힌 경하의 모습은 4.3 당시 고립된 제주도민들의 처지와 겹치며, 역사의 상처를 현재로 소환한다.
한강은 경하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투영하고 있다. 2014년 도시 학살에 관한 책을 쓴 경하의 모습은 ‘소년이 온다’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한강 자신의 모습을 대변한다. 이는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작업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그럼에도 왜 그 작업을 멈출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핵심을 관통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자는 차원을 넘어선다. 소설 속 인선의 어머니처럼 트라우마로 인해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발전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한강은 이를 통해 우리가 과거와 ‘작별하지 않는 것’이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를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을 역설한다.
더불어 이 소설은 한국 사회가 제노사이드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복잡한 위치에 있음을 상기시킨다. 제주 4.3과 5.18의 피해자로서의 경험, 그리고 베트남전에서의 가해자로서의 역사를 함께 다룸으로써,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의 다층성을 드러낸다. 한강의 섬세하고 시적인 문체는 이러한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언어는 역사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절제된 표현을 통해 오히려 그 참혹함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개인과 역사,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한강은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기억하는 것’의 고통과 필요성을 동시에 보여주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분열된 사회를 치유하고 우리 모두를 위한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p.44
오후 내내 국민학교 운동장을 헤매 다녔대.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여덟 살 여동생 시신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포개지고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하는데, 간밤부터 내린 눈이 얼굴마다 얇게 덮여서 얼어 있었대. 눈 때문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이모가 차마 맨손으론 못하고 손수건으로 일 일이 눈송이를 닦아내 확인을 했대. 내가 닦을 테니까 너는 잘 봐, 라고 이모가 말했다고 했어. 죽은 얼굴들을 만지는 걸 동생한테 시키지 않으려고 그랬을 텐데, 잘 보라는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워서 엄마는 이모 소맷자락을 붙잡고, 질끈 눈을 감고서 매달리다시피 걸었대. 보라고, 네가 잘 보고 얘기해주라고 이모가 말할 때마다 눈을 뜨고 억지로 봤대.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 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p.84
그 말을 막 들어신디 명치 이신 데 이디. 오목가심 이디, 무쇠 다리미가 올라앉은 것추룩 숨이 막혀서. 내가 죄지은 것도 어신디 무사 눈이 흐리곡 침이 말라신디 모르주. 몰른다곡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p.230
어떤 밤에는 환하게 달이 뜨고, 그 빛을 받은 동백잎들이 반들반들 윤이 났다고. 어떤 새벽엔 마을 길 가운데로 노루 떼와 삵이 번갈아 다니고, 폭우가 퍼부으면 새로 생긴 물길이 이 냇가로 쏟아져 흘렀다고. 반쯤 불탄 대숲과 동백들이 다시 울창해지는 걸 그렇게 지켜봤다고 했어. 밤새 취침 등이 밝혀진 감방에서 그걸 보고 있다가 눈을 감으면, 방금까지 나무들이 있던 자리마다 콩알같이 작은 불꽃들이 떠 있었다고 했어.
p.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