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문중의 시제 봉향이 있어 고향에 다녀왔다. 계절과 다르게 한여름처럼 무더웠다. 시제를 마치고 아버지와 점심을 함께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소나무가 우거진 선산을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께서 반찬을 좀 만들어 놓았으니 올라갈 때 가져가라고 말씀 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자연스럽게 부엌일에 재미를 붙이신 것 같았다.

오랜만에 찾은 아버지 집은 여전히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신발장의 신발들은 모두 일자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고, 싱크대에는 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으며, 안방 침대의 이불은 시루떡처럼 개켜져 있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주고자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장성한 자식들은 이제 걷다가 넘어져도 울지 않고, 사춘기 때처럼 이유 없이 짜증 내지 않으며,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는다. 세월이 흘러 그렇게 변해버린 상황에서 ‘반찬을 챙겨주는 일’이란 어쩌면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일 것이다.

여전히 자식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할 수 있다는 기쁨이 클수록 그 양도 많아졌을 것이다. 분명 이것은 좋은 일이며,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이를 원하지 않을 때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어머니와 다툰 기억은 많지 않지만, 반찬 문제에 있어서는 늘 옥신각신하곤 했다. 집에서 밥 먹을 때가 드문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항상 많은 양의 반찬을 챙겨주셨다. 조금만 달라고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막무가내로 반찬을 챙겨주셨다. 가져온 반찬들은 오랜 시간 냉장고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결국 곰팡이가 슬어서 버리기 일쑤였다. 못 먹게 된 반찬을 버릴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야속함이 함께했다. “에이~ 참. 안 먹는다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반찬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반찬을 챙겨 주신 것이다. 나는 어머니와 다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버지께는 괜찮다고, 안 먹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우와~ 맛있겠다.”라며 영혼 없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버지께서는 김치냉장고를 뒤져서 고추장아찌 한 통과 매실장아찌 두 통을 더 챙겨주셨다. “하… 이게 아닌데.” 괜히 오버했다.

가져온 김치들을 보고, 기겁한 아내가 지인들의 단톡방에 나눔을 올렸다. 다행히 다음날 거의 다 나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장아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셨을 텐데… 혹시 이거 담가놓고 보니 감당 안 돼서 ‘던지기’ 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아니면 어머니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아버지의 사랑일지도….


“아빠, 장아찌 어떻게 됐어?”
장아찌 사건을 알고 있던 아들 녀석이 뜬금없이 물었다.
“엄마가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줬대.”
“스트레스라더니…”
“그랬지.”
“사랑이 됐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