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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미 2000을 사용한 지가 얼마나 됐을까?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한때 메인으로 사용했던 펜이었지만 언젠가부터 점점 멀리하게되었다. 지금은 길들여져서 덜 하지만 아직도 가끔 필기를 하다 보면 펜촉(Nib)이 *헛발질(1)을 하곤한다. 잉크 흐름이 박하거나 필감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참고 쓸 수 있지만 헛발질하는 펜을 쓴다는 건 여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스트레스 받느니 새로운 펜을 들여 보자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찾아 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게 원래 장착되어 있던 EF 닙을 조금 더 두꺼운 M닙으로 교하기로 했다.

라미 2000은 전용 펜촉을 적용하고 있어서 일반 닙과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국내에서는 EF, F, M 굵기의 닙만 구매가 가능하다. 정가는 150,000원이지만 최저가 90,000원 정도에 구매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정도 가격이면 당근에서 원하는 닙의 중고 펜을 구매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겠다 싶다.

만년필 닙은 섬세한 작업을 요구하는 부분이라 많은 사람들이 만년필 완전 분해는 추천하지 않는다. 본인 또한 완전 분해는 추천하지 않는다. 비상 상황이 아닌 경우 가급적 서비스 센터를 이용하길 추천한다. 본문 내용이 다소 이해가 어려운 분은 아래 영상을 참고하면 된다. 무척 이해하기 쉽게 잘 만들어진 영상이다.


라미 2000 분해하기

라미 2000 만년필 분해 사진

라미 2000은 [캡] + [그립] + [닙] + [피드] + [고무링] + [O 링] + [배럴] + [피스톤 노브] 로 구성되어 있다.

그립부와 배럴 분리

가장 먼저 그립부와 배럴을 돌려 분리한다.(사진에는 닙이 없지만 원래는 그립에 닙이 꽃혀 있는 상태다) 배럴과 그립부 사이에는 동그란 링이 하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O’ 링을 잃어버리곤 한다. 특히 세면대나 싱크대에서 작업하면서 실수를 하곤 한다. 워낙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으니 잘 보관해야 한다.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구할 수 있지만 잃어버리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닐 수 없다.

그립부에서 닙이 장착되어 있는 피드를 제거하기 위해 닙 끝에서 뒤쪽으로 천천히 밀어준다.

평소 닙 끝만 볼 수 있는데, 분리를 하면 온전한 닙을 볼 수 있다.

라미 2000 닙은 다른 만년필의닙에 비해 작은편이다. 피드 끝 부분(위 사진에서는 아래 부분)에는 검은색 고무 링이 끼워져있다. 이것도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해야 한다. 본인도 별 생각 없이 세척하다가 잃어버릴뻔 했다. 고무링은 그립부와 배럴 사이에 잉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방지하는역할을 하는 듯하다.

닙 교체

닙 교체를 위해서 피드에서 닙을 분리한다. 라미의 일반적인 닙 분리와 같이 ‘앞으로 당겨 빼는 방식’이다. 좀 더 수월한 작업을 위해 닙에 테이프를 붙이고 당겨서 분리했다.

청소만을 위한 과정이라면 굳이 닙을 분리할 필요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가급적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분해와 조립 과정에서 닙이 틀어지거나 잘못된 조립으로 잉크의 흐름이 나빠질 수 있다고 한다.

새로 장착할 M 닙. 티핑도 좋고 슬릿 간격과 단차도 양호하며 분할도 5:5로 잘 되어 있다. 닙의 결합은 분리의 역순이다. 그냥 밀어 넣으면 된다.

피스톤 샤프트 분리

다음은 배럴에서 피스톤 노브를 분리해야 한다. 피스톤 노브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다 보면 저항감이 느껴진다. 그 지점에서 힘을 더 주어서 돌리면 사진과 같이 배럴과 피스톤 노브가 분리된다.

배럴 내부 청소를 위해서 배럴 안에 있는 피스톤을 면봉으로 밀어서 빼냈다. 이제 모두 완전히 분해되었다.

실리콘 그리스 도포

사진과 같이 피스톤 세 곳(피스톤 머리, 플라스틱 배럴, 피스톤 샤프트)에 실리콘 그리스를 발라주었다.

피스톤 노브에도 그냥 발라보았다. 사실, 마찰이 생기는 피스톤 머리 부분만 발라줘도 될 것 같다.

재조립 시 피스톤 샤프트 끝과 노브가 잘 결합되는지 좌우로 돌려보고 조립해야한다. 서로 아귀가 맞지 않은 경우, 피스톤이 헛 돌아서 잉킹을 해도 잉크가 올라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노브를 돌려 피스톤이 안쪽 끝까지 잘 왔다갔다하는지 창을 통해 확인하거나 느낌을 통해 꼭 확인을 하고 조립을 마무리한다. 꼭 확인!

잉크를 넣고 끄적여보았다. 다행이 헛발질도 없고 잉크의 흐름도 굉장히 좋았다. 살짝 과하다 싶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은 흐름이라고 느꼈다. M 닙은 예상대로 필감은 무척 부드러우며, 글씨의 두께는 상당히 두꺼웠다. 세필보다는 태필을 선호하는 편이라 만족스러웠다. 드디어 스트레스에서 해방이다.

성공적.


라미 2000 이야기

많은 브랜드들이 만년필의 최고봉 ‘몽블랑’을 좇던 1966년. 독일 만년필 브랜드 ‘LAMY’의 디자이너 ‘Gerd A. Muller’에 의해 스테인리스 스틸과 마크롤론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를 사용하여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 ‘모던 클래식 디자인’의 대명사 ‘라미 2000’을 선보였다. 출시와 함께 ‘바우하우스의 부활’이라는 평을 받으며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IF design, Red dot, Good Design)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Designer Gerd A. Muller

50년 전의 디자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시대를 초월한 모던 클래식 디자인’은 라미의 대표작으로 여전히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일 것이다. 14K 플래티넘 코팅 금 닙을 장착한 라미 2000은 버터를 자르는 듯, 엄청나게 부드러운 필감 – 소위 ‘버터 필감’으로 유명하다. (닙은 가장 가는 EF부터 OBB닙까지 출시되었지만 국내에서는 M 닙 이상의 굵기는 구하기 어렵다.) 몸통 전체에 잉크를 담는 피스톤 필러 방식으로 약 1.3ml의 잉크를 담을 수 있고, 펜촉이 앞 부분만 노출된 후드닙 방식을 채용해 잉크가 잘 마르지 않는다. 또한 폴리카보네이트 소재라 가볍고 그립과 배럴이 일체감 있게 이어지기 때문에 펜을 잡기도 편하다. 하지만 닙의 방향이 잘 보이지 않는 후드닙에 심플하고 매끄러운 몸통을 가지고 있다 보니 좋은 필각을 유지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다.

  1. *헛발질(Skipping) 필기 시 획이 중간중간 끊기는 현상을 말한다. 간혹 종이 재질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펜촉의 문제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펜촉 타인(tine) 간의 슬릿(slit)에 이물질이 끼거나 타인의 단차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